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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13대,14대통령 인물 연구

by 미래이장 2023. 11. 13.

미국 13대,14대통령

13대 미국 대통령 미라드 필모어에 대하여

 

13대 미국 대통령 밀라드 필모어에 대한 내용입니다. 필모어는 1850년부터 1853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직했으며,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1850년 타협안을 통해 노예주와 자유주 간의 긴장을 완화한 것입니다. 이 타협안은 캘리포니아를 자유 주로 인정하고, 워싱턴 D.C.의 노예무역을 폐지하고, 도망 노예법을 통해 남부 노예 소유주가 자유주에서 노예를 잡아갈 수 있게 했습니다.

 

외교 정책에서는 필모어가 영국과의 조약 협상을 통해 중앙아메리카의 운하 건설 독점을 금지하고 미래의 파나마 운하를 위한 기초를 마련한 1850년 클레이튼-불버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또한, 1854년에는 일본과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하여 양국 간의 무역 관계를 개선했습니다.

 

필모어는 자유 무역을 지지하며 상업적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857년 관세법에 서명하여 관세를 줄이고 국제 무역을 촉진했습니다. 또한, 대륙 횡단 철도 건설 계획과 교육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공립 학교 설립을 위한 기부 토지를 허가하는 법에 서명하고, 또한 캘리포니아 대학교 설립을 지원했습니다.

 

해군력의 중요성을 인식한 필모어는 미국 해군을 현대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세계적인 강대국으로의 부상을 위해 해군을 강화하고, 향후 발전을 위한 기초를 다졌습니다. 그러나 탈주 노예법에 대한 지지와 남북 간의 긴장은 필모어를 평가하는 데 영향을 미치며 결국 남북 전쟁의 발발에 기여했습니다.

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에 대하여

프랭클린 피어스는 1853년부터 1857년까지 미국의 14대 대통령으로 재직했습니다. 그는 개즈든 매입 협상을 성공적으로 완료하여 멕시코로부터 오늘날의 애리조나와 뉴멕시코 지역을 획득함으로써 남부 대륙 횡단 철도 노선의 건설을 가능케 했습니다. 이로써 미국은 영토를 확장하고 서부로의 미래 확장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피어스는 노예 문제에서 회피하려 했으나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의 통과로 인해 노예제도에 대한 논쟁이 불거지게 되었습니다. 이 법은 노예 여부를 주민 투표로 결정하도록 했고, 이로 인해 캔자스에서 "Bleeding Kansas"로 알려진 폭력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외교적으로는 피어스는 1854년에 일본과 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하고, 쿠바 매입을 제안하는 오스텐드 선언에 서명했으나 국제적인 강한 반발로 인해 사표를 내야 했습니다.

 

피어스는 국가 인프라의 현대화에도 주력했습니다. 그는 철도와 통신망을 통한 교통 확장을 지원하며, 국가 통합과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확장주의적인 정책은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의 임기는 후임 대통령들과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후임인 링컨의 업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냉담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3대 대통령과 14대 대통령 총평

 

미라드 필모어와 프랭클린 피어스는 미국의 13대, 14대 대통령으로, 두 사람 모두 언론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대통령들입니다. 필모어는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언론인을 탄압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언론이 정부를 비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언론이 정부의 부패와 불법을 폭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필모어는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시도하기도 했으며, 언론인을 탄압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피어스는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고, 언론과 협력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언론이 정부를 감시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았으며, 언론인을 탄압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언론과 협력하기 위해 노력하여 언론과 정부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러한 차이는 두 사람의 언론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필모어는 언론이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고, 대통령을 칭송하기 위한 도구로만 인식했던 반면, 피어스는 언론이 정부를 감시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는 중요한 기관으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필모어와 피어스는 언론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을 바탕으로 언론에 대한 전혀 다른 정책을 펼친 대통령들이었습니다.